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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인교회 설교후기] 예인교회의 공의와 정의는...

오늘 설교는 여느 때와는 달리 교회에 전반적인 운영 방향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아마도 정성규 목사님은 어제 진행된 지명방어의 교회 행사를 마치고나서 설교를 대폭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다소 익숙하게 들릴 수 있는 교회..

[예인교회 설교후기]구원은 삶의 밑바닥(BOL)에서 세워진다.

오늘 설교는 공의와 정의로 부르심 두 번째, 구원(공의와 정의를 논할 자격)에 대한 내용이었다. 오늘 정성규 목사님의 설교의 핵심은 진정한 정의와 공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원이 선행되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온..

[부천 예인교회 성경강좌 후기] 믿음과 행함, 강사 숭실대 권연경 교수

4월 한달간 부천 예인교회에서는 식사 후 오후 2시부터 예배가 진행되는 '복사골 문화센터'에서 성경강좌가 4월 한 달간 진행된다. 지난 주와 이번 주는 숭실대 권연경 교수를 통해서 '믿음과 행함'에 대한 강좌가 진행되었다...

[부천예인교회 설교 후기] 아둘람4, 다윗의 변절

< 다윗을 도피 생활 경로 > 사진출처 : archintor.egloos.com 이 설교 후기는 3월 4일 부천 예인교회 정성규 목사의 설교 '시글락 - 구부러짐'을 듣고 작성되었다. 지조 vs 변절 사실 역사 속에서 지조와..

지극히 높은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를 그위에 세우시는 줄을 사람들이 알게 하려 함이라 하였느니라
다니엘서 4장 17절


매일 고인이 된 분의 명복을 빌며...
현재 내가 다니는 신문사 연구소의 위치로 인해서 나는 매일 대한문 앞의 분향소를 지나게 된다.
분향을 하고 난 이후에도 의도적으로 분향소 앞을 아침과 저녁으로 지나는데, 그래서 그런지 계속 우울하고 아쉬운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


내가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하게 되면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는데...
난 그 분이 좋았다. 정치적 코드도 유사한 부분이 많았고, 지향점도 동의되는 바가 컸다. 아쉬운 점도 많았지만 그 아쉬움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들도 많았다. 연예인들도 별로 만나고 싶다는 생각 안하는데, 그분 만큼은 언제가 꼭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가 성장하면 꼭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젠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게 되었다니...

인터넷을 통해서 친숙해진 대통령!
개인적으로 만난적은 없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친숙하게 느끼게 된 것은 아무래도 청와대 방송을 통해서 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파격적인 정보 공개로 우리는 누구나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서 노무현 대통령이
읽 는 수많은 자료와 그분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의 모습들도 지켜 볼 수가 있었다. 당시 난 중국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진행되는 흐름을 현지에서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서 의도적으로 시사적 접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많았다. 국정 최고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자세와 태도 논의되는 내용 등은 나와 같이 호기심이 많은 청년에게는 정말 새로운 시야를 갖게해 주는 귀한 자료였다. (여담이 길어졌네 ^^;)

그분의 선택이 그 뜻을 펼쳐가는 것에 더 적합했을 수도...
그 분의 서거 소식을 접했을 때 받았던 충격과 더불어 아쉬웠던 점은 그분의 자살 소식으로 인해서 그분이 그 동안 이루었던 많은 업적들까지도 부정되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분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하루 이틀 흐르면서 만들어지는 민심의 분위기는 내가 틀렸고, 그분의 안타까운 선택이 어쩌면 그분의 뜻을 펼쳐나아가는 것에는 더 잘 맞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은 스스로의 몸을 던지므로 인해서 그분의 정신과 그분의 가족을 비롯한 그분의 사람들을 살려냈다.

예수님과 노무현 대통령의 유사성
그분이 탄핵되었을 때 기득권층의 저항에 부딪쳐서 고통받는 모습을 보면서 난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렸는데, 사실 지금도 비슷한 생각이 든다.


▶ 예수님!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셔서 죄인과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셨던 분. 그분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공생애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살려 내셨지만, 결국 기득권층의 저항에 조용히 십자가를 지셨던 분.






▶ 노무현 대통령!
역시 자신의 뜻을 위해서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자신이 가진 공의를 펼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국 기득권층에 무너져서 탄핵에 결국 죽음까지 맞이하게 되는...


예수님의 인성과 삶에 있어서 갖는 유사성
물 론 노무현 대통령과 예수님은 결코 같게 동일시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것은 예수님의 인성과 삶에 있어서 일부 노무현 대통령과 유사한 부분이 있어서 갖게되는 느낌이다.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은 사회적으로는 어떠한 평가가 있더라도, 자살이라는 수단은 신앙에 있어서 정당화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우리 사회에서 고귀한 희생으로 기록될 것이며,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우리사회와 민주화는 보다 진보할 것이라는 사실에도 깊이 동감한다.

보다 책임있는 자세로 살아가기
이제 내일이면 영정식이 거행된다. 영정식이 끝나고 난 뒤에 진행될 정치적 파장과 움직임에 많은 이들이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난 개인적으로 이러한 국민적 열망과 함성들이 정치현장에서도 뿜어져 나오기를 기대한다. 내년에 있는 지방선거를 비롯해서 2012년에 치뤄지는 19대 국회의원 선거와 19대 대통령 선거에 있어서도 책임있는 자세로 국민 모두가 임하길 간절히 바란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며 나도 미안함과 많은 책임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벌써부터 내년 지방선거에 있어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아래는 우리교회(부천 예인교회) 이진오 전도사님께서 올해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작성하셨던 글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Palm Lord'sday)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입니다. 이 날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수 많은 군중들은 자신의 겉옷을 길 위에 펴고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호산나"(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를 외치며 기쁨으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이렇게 승리의 함성과 기쁨의 노래 속에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은 거룩한 유월절을 준비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쫒고 짐승 파는 자들의 상을 뒤엎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으며,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을 상대로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그들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고발했습니다. 종말과 재림을 강론하시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함께 하셨으며 겟세마네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고뇌하며 기도했습니다.

 

유다를 앞세워 검과 망치를 들고온 무리들에게 붙잡히신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 빌라도, 헤롯 등에게 여기저기 끌려 다니며 재판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저주하며 예수님을 부인했고 다른 제자들은 도망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매달릴 십자가를 지고 조롱당하며 죽음의 언덕을 올라 처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마태복음 27:1~26은 예수님이 십자가형에 처한 과정이 담담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누구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여러 개인들과 무리가 공조한 결과 임을 증언합니다.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까요?

 

첫째, 예수님을 직접 "고소"한 대제사장과 장로들입니다. 이들은 '산헤드린 공회'라는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공식기구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합니다. 당시 산헤드린 공회는 중앙 세력인 사두개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종교적 대표 기구로서 예루살렘 성전을 관장하고 모든 제사 절차를 주관했습니다. 성전에 바쳐진 재물과 성전세를 관리했으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배정하는 권한도 행사했습니다. 또한 공회는 로마 통치의 간접기구로 정치적 통로였습니다. 이에 따라 로마에 바치는 세금은 세리들에 의해 걷혀 산헤드린 공회를 통해 전달되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부정과 부패가 있었습니다.

 

다른 복음서의 병행된 말씀들을 보면 이들의 고소에 지방 회당의 중심 세력인 바래새인들도 함께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는 신구약 중간기 때 시리아 셀리큐스 왕조와 이집트 프톨레미 왕조 사이에 끼어 수많은 박해를 받고, 특히 적그리스도의 원형인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등에게 처참한 죽음과 고통을 받으며 변질되어 갔습니다. 이때 종교적 순수성을 지킨 자들이 경건주의자들인 '하시딤'이었고 이들의 후예가 바래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죽음으로 신앙을 지켰고 세세한 율법을 통해 거룩성을 유지했습니다.

 

이후 로마는 유대를 정복한 이후 민족적, 종교적 유화 정책을 썼고 이런 과정에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은 중앙 예루살렘 성전과 지방 회당을 중심으로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왜 예수님을 고소했을까요? 당시 이들은 유대 땅의 상당 부분을 소유하고 백성들을 소작농으로 해서 얻는 이익, 종교세, 성전세, 성전 장사 제공에 대한 대가, 심지어 로마에 바치는 세금 중 일부의 수탈 등 경제적 기득권을 놓치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저들은 공회에서 모의하면서 예수님을 그대로 놔두면 로마인들이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고 말합니다.(요11:48)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상실할 것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믿고 알고 있는 율법의 정신, 성전의 신성, 메시야에 대한 기대 등을 예수님이 모독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27:18절에서 빌라도의 태도에서 한 가지 힌트가 있습니다.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저들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의 율법 정신,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행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예수님에 대해 시기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배반"하고 넘겨준 유다입니다. 예수님과 3년 반을 함께 생활한 유다의 배신은 의외이고 쉽게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이들은 로마로 부터의 국가적 해방을 염원했던 유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예언을 듣고 실망해서 그를 넘겼고 그런 극단적 상황이 오면 예수님이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다는 십자가 죽음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었고 단지 이를 순종하며 사용된 자라고 말합니다.

 

그 러나 요12:6 에서 요한은 유다는 예수를 따르던 무리의 돈 궤를 맡은 자나 돈 궤의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라고 지적합니다. 마26:15에는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면 얼마를 주겠냐고 흥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았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증언은 간결합니다. 바로 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유다는 예수를 팔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한 것입니다. 물론 유다는 배신하고 넘겨주었지만 예수님을 3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했던 베드로나 도망갔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였습니다.

 

셋 째,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의 "비겁함"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정치권력적으로 유대인의 왕을 자처하고 있지 않고, 고소자들이 시기로 예수님을 넘겨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꿈을 통해 예수님이 옳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빌라도에게 증언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민란을 두려워하여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 형을 선고합니다. 그는 정치적 책임자로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이기로 사법적 결정을 하면서 자신은 그 피 값에 죄가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비겁함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넷째, 수많은 백성들의 "무지"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할 때 호산나를 외치며 기뻐하고 환호했던 바로 그들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시고, 병을 고치고, 오병이어를 행하고, 죽은 자를 살릴 때 감격하며 따랐던 그 무리들입니다. 그들이 빌라도가 누구를 놓아주기 원하는가 물을 때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살아있는 권력자인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두려워 했을지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의 권력을 가진 메시야여야할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에 실망하고 분노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시대의 패역함을 읽는 눈도,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닫는 마음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알아 볼 실력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시기심을 다 내려놓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을까요? 온갖 조롱을 받으며 초라하게 십자가를 향해 가는 예수님을 보며 유다처럼 배신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을까요? 민란이 날까 두려워하며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자신의 정치적 기득권을 유지한 빌라도처럼 비겁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저는 죄가 없다 선언할 수 있을까요? 권력을 가진 지도자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바라보는 가운데도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놓아 달라 외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시대를 분별하는 눈을 가지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나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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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계개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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